1.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1392~1398)는 조선건국을 1392년에 했습니다.
도읍의 기틀마련은 한양천도(1394), 경복궁 건설(1395), 궁궐. 종묘. 사직등을 건설했습니다.
통치제제는 고려의 통치 체제 고려의 도평의사사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의흥삼군부를 설치(1393)하여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삼군도총제부(1391, 공양왕)를 개편하였습니다.
의흥삼군부는 조선 초기 군령과 군정을 총괄하던 관서역할을 담당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조선 왕조의 창건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1392년 조선을 창건하여 조선 왕조의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한 것입니다. 이는 국가의 권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 효율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한, 태조는 유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국가 이념을 정립하여, 정치적 안정과 함께 문화적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삼강오륜을 강조하며, 이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이념은 후에 조선의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군사적 업적도 두드러지는데,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막으며 국방을 강화했습니다. 이성계는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안보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업적은 단순히 왕조의 창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틀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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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등용합니다.("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은 왕도정치를 바탕으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합니다.
민본적 통치 규범 마련을 위해 : <조선경국전>, <경제문감>을 저술합니다.
성리학적 통치 이념 확립을 위해 :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합니다.
대명 정책으로 : 요동 정벌 추진 목적으로 <진도>(진법서)를 편찬합니다.
★1-1. 제1차 왕자의 난(1398):
방석이 세자로 책봉 → 방원이 동생 방번. 방석을 살해함, 정도전. 남은을 제거→방과를 왕으로 추대함(정종)
제1차 왕자의난은 1398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 다툼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초기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왕실의 후계 문제와 관련된 갈등을 드러낸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태조 이성계의 왕위 계승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태조는 여러 왕자 중에서 정통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여러 왕자에게 각각 일정한 권한을 부여했으나, 후계자 문제는 불안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왕자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태조의 첫 번째 아들인 **대왕대비 강 씨의 아들, 정종(후에 조선 제2대 왕)**과 셋째 아들인 연산군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었습니다.
이성계의 둘째 아들인 이방원의 지휘 아래 **정종(후에 조선 제2대 왕)**과 연산군을 비롯한 많은 왕자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면서 왕위를 정종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에 권력 다툼이 일어날 때와 후계자 문제가 어떻게 큰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정치적인 분열과 폭력적인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결국 이방원의 세력 확대와 왕실 내의 권력 구조 재편성을 가져왔으며, 이 사건은 이후의 정치적 갈등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용했습니다. 이 사건 후, 정종은 왕위에 올라 조선 제2대 왕이 되었지만, 왕자의 난은 그 이후에도 조선 정치와 왕실 내에서 왕위 계승 문제를 계속해서 논란거리로 만들었습니다.
2. 정종(1398~1400)
일시적으로 개경 천도(1399)←잠시 정치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임.
도평의사사 →의정부로 바뀜(정무) / 중추원 →삼군부(군무), 승정원(왕명 출납역할)
★2-1. 제2차 왕자의 난(1400) 역사적 배경과 그 의미
제2차 왕자의 난은 19세기 조선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17세기 초 발생한 정치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된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고,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 왕조 내에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세력 간의 격렬한 경쟁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난은 권력의 중심이었던 왕과 그를 둘러싼 왕족들, 신하들 간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제2차 왕자의 난은 당시 사회의 권력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조선 정치의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난은 단순한 왕위 쟁탈전이 아닌, 당시 왕실과 정치권력의 구도 변화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왕실 내에서의 권력 다툼은 국정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왕권 강화와 더불어 정치적인 대립은 심화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조선 왕조의 정치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왕권의 강화와 정치적 안정화를 위한 다양한 개혁이 필요함을 시사하게 되었습니다.
3. 태종(1400~1418)
■3-1. 왕권 강화책:
- 6조 직계제 실시합니다.
- 사간원을 독립합니다.→ 왕의 직속 기구화 →대신과 외척 세력 견제입니다.
- 제2차 왕자의 난(1400) 이후 사병을 혁파합니다. 사병은 관군으로 편입→국왕이 군사권을 장악합니다.
■3-2. 경제 정책:
- 양전사업을 실시합니다.(20년마다): 은결을 색출하고, 토지 비옥도 조사를 해서 양안을 작성합니다.
- 호구 조사해서 호적을 작성합니다.
- 사섬서를 설치하고 저화를 발행합니다.
- 사원을 정리합니다. (2000여 개를→ 242개로 정리합니다.) → 토지, 노비 몰수 → 국가 재정을 확충합니다.
- 노비 변정도감을 실시하여 억울한 노비를 해방시켜 줍니다.
■ 3-3. 사회 정책:
- 호패법을 실시합니다.
-인보법 실시합니다.(10 가구를 단위로 묶어서 통제합니다. 이는 농민 유망. 이탈 방지책입니다.)
- 신문고를 설치합니다.(형식적) → 영조 때 다시 부활합니다.
■ 3-4. 문화 정책:
- 주자소(활자 주조, 인쇄 담당)를 설치하여 계미자를 제작합니다.
■ 3-5. 유교 정책:
- 서얼차대법을 제정하여 → 서얼의 문과 응시를 제한합니다.
- 녹안(재가녀 명부), 자녀 안(3번 이상 결혼한 여자 명부)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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